기타

산다는 것.

白夜(백야) 2022. 2. 18. 12:12

무등산에서본 화순쪽 파노라마 촬영:백야

 

큰 형님이 쓰러지셔서 한때 서울 큰 병원에 계시다가 병원을 옮기시게 되서 경기도 양평에 있는 요양 병원으로 옮기셨었다.

남쪽 광주에 있는 나로서는 참 멀리 가야 하는 곳이어서 한번이라도 가야 할려면 복잡하게 이리 저리 차를 바꿔타야 했다.

양평은 아주 오래 오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내가 잠간 두달 정도 살던 곳이었다.

무척 옛날이어서 정말 지금으로 생각하면 내가 시골 출신이어서 그렇지 지금 같으면 그때 그 환경이라면 가서 생활을 할수 있을가 대답을 자신있게 못할것 같다.

그 때가 70년대 중반이었는데 어찌 어찌 해서 경기도에서 시행하는 지방 공무원 시험에 합격이 되어 발령은 받은 곳이 경기도의 00 면이라는 곳이었다 옆에 면이 청운면이고 옆에가 용문면이고 한면만 거쳐 지나면 그대로 강원도로 빠져 버리는  위치였다.

형님이 양평으로 병원을 옮기신 뒤 병 문안 가면서 정말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가 무척 궁금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그리 많이 변하지 않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워낙 지리적으로 집에서 멀어 서울쪽 계시는 형님과 함께 병문안을 가곤 했는데,양평을 도착해서 식당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다 보니 옛생각이 나서 잠시 추억이 머리속을 휘젓고 다녔다.아직 군 입대하기도 전이었으니 지금 같으면 철없는 나이였다.

그때 발령받아 면사무소에서 하숙집을 소개해 주는데 숙박업과 식당을 하는 그런 집이었는데 그집에는 나 외에 몇분의 하숙하시는 분들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하숙집서 배정해 주는 방이 방음장치가 잘 되지 않은 방이어서  옆방의 술취한 남녀 손님이라도 들을라치면 말소리도 들리고 또한 남녀의 야릇한(?)숨소리 잡음까지 몽땅 들려 밤새 잠을 설쳐야 하는  그런 방이었다. 그래도 식당겸이란 곳이어서 지금도 생각 나는 그집의 곰탕이 일품 이었던 생각이 문득 든다.곰탕에 올려진 사태살이 푸짐하고 무척 컸던 기억이 난다.

어떤날을 숙박객이 숙박료도 안내고 새벽도주 했다고 법석을 떨면서 잡으러 쫓아가고도 했다.그곳에는 차씨성을 가진 초등학교 선생님이 같이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교대 학창 시절에 클래식 기타아 반에서 기타동아리반 활동을 하셨던  분이었는데 난 그때 클래식 기타아 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운줄 알았다.

그분이 클래식 기타아로 아람브람궁의 회상을 트래몰로 주법으로 연주해주시는데  그렇게 아름다울수가 없었는데 나도 배워서 저렇게 멋지게 연주해야지 했는데 난 손톱이 클래식 기타를 연주 할수 없는 손톱으로는 하자가 있어 결국 포기 하고 말았다.

그분께서 클래식 기타 연주 주법  야포얀드 인가 하는 주법을 가르쳐 주시곤 했는데 교본이 카르카치교본이였나 생각이 든다.

또 다른 분은 박씨라는 같이 면에 근무하는 동료겸 형님 뻘 되시는 나보다 나이가 몇살 많으신 분이었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참 마음씨 착한 인상도 참 좋은 아주 순하게 생기신  분이었다.

그런 분이 하루는 술에 잔뜩 취해서 무척 고민을 하시는데 난 그때 아직 나이가 어려서 몰랐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 그 시절에 아주 시골에서는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면 무척 대단한 사위감으로 보았던것 같았다.

그런 그 분이 인물도 괜찮고 직장도 그러니  어느집에 초청을 받아 가서 저녁을 대접받고 반주에  취해서  자다가 밤중에 들여보낸 그집 딸과의 하룻밤 인연으로 코가 꿰인 것이었다. 아마 그 때에는 그런 방법을 많이 사용했던 숫법이었던 같다. 하룻밤 인연이 어쩔수 없는... 그뒤로 떠나서 어찌 되었는지 그 마침표를 듣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분이 어찌사시나  하는 궁금한 생각이 든다. 형님이 양평 병원에 계실때 세번인가  병문안을 간뒤로 갈기회가 없어 다시 기억속에서 잊혀진 도시가 되고  말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옛추억을 더듬어 다시 한번 양평쪽을 여행을 하고 싶어진다.

요사이는 모든 일들을 진행해가면서 그동안의 인연으로의 연결을 계속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번 맺혀진 인연을 다시 만들기가 다시 그 시간이 주어 질지도 모르고 그동안 쌓여진 추억들이 잊혀지는 것이 아쉬움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이  자식들에게 자칫 오해 받기 쉬운  일이 되기도 한다.

얼마전에 애들과 한 약속을 잊고도 다른 새로운 약속으로 인해 아이들한테 자기들보다 타인을 더 소중히 여긴다고 불평을 듣고 오해를 샀지만 이제 어차피 애들이야 그 인생을 가는 것이고 나는 내 인생을 가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들어 이제 품안의 자식이란 말대로 모든 걱정을 잊고 내 길을 가야 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특히 결혼 않은 자녀들때문에 걱정을 해봐야 이제 우리 세대와 어차피 세대 차이가 나서 그렇게 마음끓여 봐야 안되는 일은 안되는일이니 그냥 생각 날때에만 고민을 하고 마음 끓이지 말고   내려 놓았다.

큰 형님이 결국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그 웬수 같은 코로나 덕분에 형님과 말도 제대로 섞지 못하고 하루 전에 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에서 정신이 잠간 든 사이에 몇마디  못나누고  가시고 난뒤   마지막으로  장례식장에서 입관식 때 마지막  고인 모습을 보실분 보세요, 할때 그 차디찬 이마에 두손을 얹고 서러워서 형, 울형, 하고 울었다.

누가 사는 것이 무엇일가 하고 물으면 뭐라 대답할수 있을가..

굳이 자꾸 죽음에 대하여 의식하고 살필요는 없지만 가끔가다 이 사는 동안  나에게 지금 주어진 시간들이 얼마나 중요한가 다시 한번 지금 이때 이시간 헛되이 보내지 말자 하고 생각을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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